<밥돈면이야기>

5_탈출의 밤

불주먹 류니쓰 2024. 11. 28. 08:40

주의: 트리거 경고
이 글은 데이트폭행과 관련된 경험을 다루고 있습니다. 글에는 폭력, 협박, 자해 등의 구체적인 상황이 서술됩니다. 특정 내용이 독자에게 심리적 불편함이나 트리거를 일으킬 수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글을 읽기 전, 스스로의 감정 상태를 점검하고 필요하면 상담기관의 도움을 받아주세요.




거실을 가로질러 밖으로 나가려는 나를 김영수가 막아섰다. 내 손에 들려있는 가방을 빼앗아 방 안으로 집어던졌다. 그러더니 무릎을 꿇고 울면서 제발 가지 말라고 내 다리를 붙잡고 울기 시작했다.

너무 지겨웠다. 화내고 울고, 화내고 울고, 고작 세 달 만나는 동안 몇 번째 반복되는 이 짓거리인지. 지겨웠다. 내 인내심은 바닥이 났고, 나는 더 이상 받아줄 의향이 없었다. 머릿속에는 당장 이 공간에서 나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김영수의 손이 내 몸에 닿는 것도 싫었다. 손을 뿌리치고 방에 들어가 가방을 가지고 나왔다.

김영수가 몸으로 내 몸을 막아섰다. 내 손을 잡고 울면서 가지 말라고 빌었다. 그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나한테 손대지 마.”

불과 5분 전까지 나를 때리려 했던 사람이 미안하다고 울면서 나를 붙잡는다는 게 소름 돋았다. 그냥 벗어나고 싶었다. 나가고 싶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나가고 싶어. 나가고 싶어. 내보내 줘. 내보내 줘.

물에 빠진 사람이 살고 싶어서 반사적으로 허우적거리는 것처럼, 나는 아무 생각도 못하겠고 머릿속에 당장 여기서 나가야 한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나 보다. 김영수는 그런 나를 집 밖으로 못 나가게 계속 막고 있었다. 답답해서 죽을 것만 같았다.

“집에 보내줘.”
“나가게 해 줘.”
“내 몸에 손대지 마.”

앵무새처럼 이 세 마디만 반복했다. 김영수는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이 죽을죄를 지었다며 엉엉 울기 시작했다. 그러다 스스로 뺨을 때리기 시작했다. 눈물과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에 손바닥이 부딪히는 끈적한 파열음이 내 귓가에 맴돌았다. 그 소리가 날 때마다 내가 좋아하던 여름이 조금씩 멀어졌다.

너무 덥고 힘들었다. 두어 시간 동안의 실랑이에 지칠 대로 지쳤다. 땀에 젖은 내 몸은 축축했다. 습한 공기에 숨이 막히는 건지, 이 공간이 숨이 막히는 건지, 눈앞에 무릎 꿇고 있는 이 사람이 나를 숨 막히게 만드는 건지 구분조차 되지 않았다.

왜 나를 놓아주지 않는 걸까.
그날 밤을 복기할 때마다 여름이 소름 끼치도록 싫어진다.



어둡고 고요했던 거실에 김영수가 흐느끼며 스스로 뺨을 짝짝 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핏줄이 다 터져서 보라색이 되고 퉁퉁 부을 때까지 자신의 얼굴을 학대하는 인간에게, 나는 그만하라고 말했다.

“제발 그만하고 나랑 헤어져줘. 제발 나 좀 놔줘.”

무릎을 꿇고 울면서 빌었다. 제발 나 좀 놔달라고, 두 손 모아 싹싹 빌었다.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빌었다. 정말 간절하게 빌었다.

그동안 김영수를 만나면서 무언가를 이토록 바란 적이 없었다. 딱히 그럴 마음도 들지 않았다. 내가 가방을 사달래, 차를 사달래, 구두를 사달래. 어려운 거 아니잖아. 처음으로 간절하게 바라는 것이 이별이었다.

나랑 헤어져줘.

내가 헤어지자고 말하며 빌고 있을 때 김영수가 갑자기 화장실로 달려갔다. 그리고 면도칼을 가져와 손목을 그었다. 눈앞에 피가 흩뿌려지는 순간, 나는 이다음 장면을 내 눈에 담을 자신이 없었다. 두 눈을 질끈 감고 엎드려 울었다.

내 간절한 호소에 돌아오는 것이 이따위 협박이라니. 그의 자해는 나를 이곳에 묶어놓으려는, 살면서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형태의 협박이었다. 나는 공포와 무력감에 사로잡혀 이곳에서 벗어날 방법을 더 이상 찾을 수 없었다.

나의 간절함은 그의 눈에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 같았다. 마음이 부서질 것 같아서 울음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그때의 나는 억울했고 죽고 싶었고, 또 살고 싶었다.

엎드린 채로 울다가 결국 그대로 잠이 들었다. 방에 들어가서 편하게 자라고 나를 깨우는 김영수의 손을 뿌리쳤던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눈을 뜨니 거실이 밝아져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시계를 확인하니 7시 정각이 막 지나 있었다. 마지막으로 시계를 봤을 때가 4시였으니, 3시간 정도 잠들었던 모양이다.

김영수는 자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방으로 들어가 지난밤에 그가 던져놓은 내 가방을 들고 나왔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김영수도 눈을 떴다. 그리고는 나에게 자기 얼굴이 왜 이러냐며 누가 그랬냐고 물었다. 다 기억하면서도 못하는 척하는 꼴이 우스웠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그대로 현관을 향해 걸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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