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트리거 경고
이 글은 데이트폭행과 관련된 경험을 다루고 있습니다. 글에는 폭력, 협박, 자해 등의 구체적인 상황이 서술됩니다. 특정 내용이 독자에게 심리적 불편함이나 트리거를 일으킬 수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글을 읽기 전, 스스로의 감정 상태를 점검하고 필요하면 상담기관의 도움을 받아주세요.
습도가 높아서 숨이 턱턱 막히는 한여름밤이었다. 가만히 누워있는데 땀이 몸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리는 느낌이 났다. 끈적거리는 공기가 코에, 입에, 숨에, 몸에 들러붙었다. 김영수네 집에는 에어컨이 없었다. 창문을 열었는데 더운 바람이 들어와서 시원하기는커녕 더 불쾌했다. 자기가 사는 동네는 산간지역이라 여름에도 시원하다더니, 이 새끼가 하는 말은 하나부터 열까지 다 거짓말이었다.
저녁에 시내에서 김영수 친구들이랑 술을 마시고 집까지 걸어 들어왔다. 달가운 자리는 아니어서 나는 술은 별로 안 마시고 김영수 혼자 마시다가 만취해 버렸다. 만취한 김영수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진이 다 빠져버려서 씻을 기운도 없이 드러누웠다.
분명 이쪽 길이 원래 가던 길이라니까 저쪽이 지름길이라면서 언덕으로 빙 돌아가지를 않나, 한참 걸어가다 갑자기 본인이 키가 작아서 미안하다며 길에서 냅다 무릎 꿇고 사과하지를 않나, 친구들이랑 모임이 사실은 성매매 단톡방이라고 미안하다고 앞으로 안 만나겠다고 실토하 지를 않나. 실망할 일이 이만저만이 아니라서 화가 많이 나 있었다. 인내심의 한계였다. 기분이 안 좋았다. 최대한 빨리 잠에 들고 싶었다. 빨리 잠들어야 내일이 오고, 내일이 와야 인천에 올라갈 수 있으니까.
7초 동안 들이마시고 4초간 내뱉으면 빨리 잠들 수 있다고 어디에서 본 기억이 났다. 호흡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옆에서 드르렁 코를 골며 자던 김영수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내 몸 위로 올라오는 것이었다. 자다 깨서 갑자기 성관계를 요구했다. 덥고 졸리고 지쳤기에 당연히 거절했다. 그가 내게 재차 성관계를 요구했다. 나는 너무 힘들다고 거부했다. 몸을 뒤로 돌려서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그 순간, “왜 무시하냐”는 말과 함께 욕설이 쏟아졌다.
하… 기가 찼다. 술 취한 사람이랑 무슨 말이 통할까 싶어서 반응하지 않았다. 왜 본인을 무시하냐면서 누워있는 나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내 몸을 잡고 흔들면서 왜 본인을 무시하냐고 소리를 질렀다.
듣기 싫었다. 대답하지 않았다. 반응하고 싶지 않았다. 반응할 에너지가 없었다. 무반응한 나를 보더니 김영수가 갑자기 주먹으로 벽을 치기 시작했다. 씨발씨발거리면서 벽을 쾅쾅 내리쳤다.
내 인내심은 거기까지였다. 더 이상 김영수랑 같은 공간에 있기 싫었다. 말없이 거실로 가서 내 짐들을 챙겼다. 한창 벽을 치다가 짐 챙기는 나를 발견한 김영수가 나를 막아서면서 지금 뭐 하는 거냐 물었다. 대답하지 않았다. 원래는 다음날 아침에 집에 올라갈 생각이었는데 그 순간 바로 나갈 생각이었기에 묵묵히 내 짐만 챙겼다.
널어놓은 빨래들을 챙기려고 베란다에 나섰는데, 김영수가 나를 따라 나왔다. 갑자기 나한테 욕을 했다.
“씨발벌레년아. 니가 뭔데 나를 무시해. 맞고 싶냐?”
그러더니 주먹을 들어서 내게 휘둘렀다. 주먹이 내 눈앞까지 왔다. 얼굴에 닿기 직전에 멈췄다. 너무 무서웠다. 눈물이 터질 것 같았는데 여기서 울면 안 되는 걸 알고 있었다.
원래 맞을 때 울고불고 잘못했다고 액션 취하면 더 때리고, 가만히 반응 안 하면 몇 대 때리다 만다. 원래 그렇다. 그냥 알고 있다. 부들거리는 김영수의 주먹이 허공에 떠있었다.
“쳐. 쳐봐. 해봐. 어떻게 되나 한 번 보게.”
라고 말했다.
진짜 때리면 어쩌지? 창문으로 뛰어내릴까? 소리 지를까? 좁은 베란다에는 내가 숨을 곳도 도망갈 곳도 없었다.
행동을 멈춘 김영수에게 더 큰 소리로 외쳤다.
“치라고!!!!!!”
김영수는 나한테
“조용히 해라 씨발년아 밑에 다 들린다고.”
라고 말하며 나를 집 안으로 밀어 넣었다. 당시 김영수네 집 1층에는 부모님이 운영하는 식당이 있었고, 건물 지하에는 부모님이 거주하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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