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돈면이야기> 9

9_새로운 환경

새로운 환경 사람들과의 연대가 나를 다시 일어나게 했다면, 새로운 직장은 나를 한 발짝 더 내디딜 수 있게 했다.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서 하나씩 배우며 적응해 가는 과정은 내게 또 다른 도전이자 기회였다.바쁜 나날들을 보냈다. 피부미용사 자격증 시험에 합격한 뒤, 취득한 자격증으로 새로운 직장에 들어갔다. 집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작은 피부과 병원이었다. 면접에서는 성격 좋아 보이는 원장님을 만났고, 친절한 직원이 내게 맞는 유니폼을 보여주며 병원 내부를 안내해 줬다. 분위기가 좋아 보였다. 직원은 열 명 정도로, 모두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 딱히 따지는 성격이 아니라서 “이 정도면 괜찮겠다” 싶어 다음 주부터 출근하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한국에 돌아온 뒤 처음으로 직장을 가지게 되었다. 몇 년 만에..

8_사람으로 치유받다

사람으로 위안을 얻다그 일을 겪고 난 후, 내가 피해자의 모습을 하는 게 싫었다. 다 잊어버리고 싶었다.데이트 폭행을 당한 약해빠진, 가녀린 피해자 프레임 안에 갇혀 있는 게 싫었다. 김영수를 사귀는 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도 만나고, 술도 신나게 마시고, 매일같이 놀았다. 정말 매일같이 술을 마셨다. 술로 잊으려 했다.사람들과의 연결을 놓지 않았다. 혼자 있으면 그날 밤의 악몽이 떠올라서 혼자 있기 싫었다.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내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김영수 썰을 풀었다. 내게는 그저 가벼운 일인 것처럼 얘기했다.“삼 개월 사귀는 동안 별의별 일을 다 겪었다.”“역대급 쓰레기를 만났다.”이렇게 말했다.김영수는 내게 그저 술자리에서 웃고 떠들 이야기감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그렇게 취급..

7_꿈이기를 바라는 현실

김영수네 집에서 나와 곧바로 터미널로 갈 수가 없었다. 김영수가 나를 쫓아올까 봐 두려웠다. 김영수가 살던 곳은 정말 작은 시골동네여서 터미널까지는 걸어서 고작 십 분 거리였다. 덜덜거리는 소리가 나는 캐리어를 끌고 터미널까지 가는 십분 남짓한 시간동안에 김영수의 지인들이 운영하는 가게 두 곳을 지났고, 김영수의 지인도 마주쳤다. 김영수가 마음만 먹으면 나를 바로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더욱 불안해졌다. 터미널로 가는 동안 버스를 예약했다. 인천으로 바로 가는 버스가 없어서 우선 동서울터미널로 가는 버스를 예매했다. 이마저도 가장 빠른 시간으로 예약할 수가 없었다. 두어 시간 뒤의 버스를 예약했다. 김영수가 터미널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봐 무서워서.   버스시간이 될 때 까지 몸을 숨길곳..

6_도망친아침

주의: 트리거 경고이 글은 데이트폭행과 관련된 경험을 다루고 있습니다. 글에는 폭력, 협박, 자해 등의 구체적인 상황이 서술됩니다. 특정 내용이 독자에게 심리적 불편함이나 트리거를 일으킬 수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글을 읽기 전, 스스로의 감정 상태를 점검하고 필요하면 상담기관의 도움을 받아주세요.방에 들어가서 편하게 자라고 나를 깨우는 김영수의 손을 뿌리쳤던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눈을 떠보니 거실이 밝아져 있었다.정신을 차리고 시계를 확인하니 7시 정각이 막 지나 있었다. 마지막으로 시계를 봤을 때가 새벽 4시였으니, 약 3시간 정도 잠든 셈이었다.김영수는 자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방으로 들어가 지난밤 그가 던져놓은 내 가방을 들고 나왔다.인기척을 느꼈는지, 김영수도 눈을 떴다. 그는 나를 보며..

5_탈출의 밤

주의: 트리거 경고이 글은 데이트폭행과 관련된 경험을 다루고 있습니다. 글에는 폭력, 협박, 자해 등의 구체적인 상황이 서술됩니다. 특정 내용이 독자에게 심리적 불편함이나 트리거를 일으킬 수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글을 읽기 전, 스스로의 감정 상태를 점검하고 필요하면 상담기관의 도움을 받아주세요.거실을 가로질러 밖으로 나가려는 나를 김영수가 막아섰다. 내 손에 들려있는 가방을 빼앗아 방 안으로 집어던졌다. 그러더니 무릎을 꿇고 울면서 제발 가지 말라고 내 다리를 붙잡고 울기 시작했다.너무 지겨웠다. 화내고 울고, 화내고 울고, 고작 세 달 만나는 동안 몇 번째 반복되는 이 짓거리인지. 지겨웠다. 내 인내심은 바닥이 났고, 나는 더 이상 받아줄 의향이 없었다. 머릿속에는 당장 이 공간에서 나가고 싶..

4_최악의 여름밤

주의: 트리거 경고이 글은 데이트폭행과 관련된 경험을 다루고 있습니다. 글에는 폭력, 협박, 자해 등의 구체적인 상황이 서술됩니다. 특정 내용이 독자에게 심리적 불편함이나 트리거를 일으킬 수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글을 읽기 전, 스스로의 감정 상태를 점검하고 필요하면 상담기관의 도움을 받아주세요.습도가 높아서 숨이 턱턱 막히는 한여름밤이었다. 가만히 누워있는데 땀이 몸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리는 느낌이 났다. 끈적거리는 공기가 코에, 입에, 숨에, 몸에 들러붙었다. 김영수네 집에는 에어컨이 없었다. 창문을 열었는데 더운 바람이 들어와서 시원하기는커녕 더 불쾌했다. 자기가 사는 동네는 산간지역이라 여름에도 시원하다더니, 이 새끼가 하는 말은 하나부터 열까지 다 거짓말이었다.저녁에 시내에서 김영수 친구..

3_처음부터 있었던 경고 신호들

김영수의 행동에는 폭력적인 성향이 드러나는 전조증상들이 분명히 있었다.첫 번째, 전 연인을 과도하게 비난김영수는 전 여자친구를 과도하게 비난했다. 그는 전 여자친구가 몰래카메라를 설치하고 자신을 도발한 뒤 경찰에 신고했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그는 “합의금을 뜯어내려 했다”, “나는 피해자였다”라는 말을 반복하며 자신을 피해자로 보이게 만들었다. 당시 나는 그의 말에 큰 관심이 없어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지금 생각해 보면, 그는 자신이 한 행동은 덮고, 오히려 전 연인을 철저히 악마화하고 있었다. 이는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과장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신호였다. 두 번째, 통제적인 태도그는 나에게 화장을 권유하며 “여자는 여성스러워야 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 화장뿐만 아니라, 내 옷차림과 행동..

2_김영수와의 첫 만남

김영수와의 첫 만남은 호주에서 4년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 시작되었다. 그때 나는 과거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유학 시절 동안 살이 많이 쪘고, 그것 때문에 사람들을 만나기 꺼렸다. 모든 걸 단절하고 다이어트에 집중하고 싶었다. 주변에게 입국했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고 운동을 시작했다. 김영수는 운동하면서 만난 남자였다. 처음엔 단순한 동료였지만, 매일같이 얼굴을 마주치다 보니 어느새 가까워졌다. 그는 처음에 다정하고 배려 깊은 사람이었다. 나를 ‘공주님’처럼 대하며 모든 걸 들어주고, 세심하게 챙겨주는 그의 모습에 나도 마음을 열었다.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니, 그때 내가 알아채지 못했던 신호들이 분명 있었다. 그의 다정함은 진정성이 아닌 소유욕에 기반을 둔 것이었고, 그의 말 속에는 미묘..

1_벗어나기 위해 말해야 하는 이야기

데이트폭행은 여전히 많은 사람이 가볍게 넘기는 문제다. “연인 사이에 싸울 수도 있지 않나?”, “이별을 앞두고 감정이 격해질 수도 있잖아”라는 말로 폭력의 본질을 가리고, "맞을 짓 한 거 아냐?"라는 등의 말로 피해자를 비난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하지만 폭력은 절대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폭력은 절대 피해자의 탓이 아니다. 연인이라는 친밀한 관계를 무기로 삼아 폭력을 행사하는 데이트폭행은 더더욱 그렇다. 이런 폭력의 근본적인 문제는 피해자가 목소리를 내지 못하도록 억누르는 사회적 분위기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데이트폭행 사건이 발생하면 초점이 피해자에게 맞춰지는 것이 가장 문제다. 피해자에게 맞을 짓을 했는지, 피해자에게 도덕적 프레임을 씌우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내가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