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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1세기를 맞이하며 태어나 신세대의 지표가 되었다. 사회는 내 나이를 듣고 월드컵을 기억이나 하느냐고 묻는다. 어른들은 자꾸만 우리에게 MZ라는 이름으로 위악을 표방한 행위를 종용한다. 우리는 신세대, 이 시대의 젊은이, 해방구를 찾아 헤매는 자유로운 영혼, 행복과 방탕을 찾아 직진하는 기이한 세대.
그러나 틀렸다. 우리는 트라우마의 산증인이다. 우리 중에 2014년 4월 16일, 그날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잊어버린 사람은 아무도 없다. 새학기, 기묘한 봄의 온도가 코끝에서 채 가시지 않은 봄날이었다. 하교 시간이 다가올수록 이상하게 교실이 술렁였다. 집에 가서 가방을 내려놓으니 엄마가 TV를 틀어놓고 허망한 얼굴로 말했다. 딸, 아이들이 너무 많이 죽었어. 수학여행과 현장체험학습이 줄줄이 취소됐다. 우리는 봤다. 나와 같은 교복을 입고, 나의 친구가 될 수도 있었던, 또 내가 될 수도 있었던 아이들이 사라지는 걸 봤다. 그리고 뼈에 새겼다.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믿지 않기로 약속했다.
우리는 또 봤다. 나의 친구들, 나의 또래들, 우리의 세대가 노동 현장에서 죽는 것을 봤다. 콜센터에서 전화를 받다가 자살했고, 제주 생수공장에서 죽고, 따개비를 따다가 익사해서 죽었다. SPC제빵 공장에서 죽었다. 기본적인 안전 수칙도, 안전 기기도, 안전 교육도 없었다. 우리 세대, '나'라는 이름으로 묶일 수 있는 누군가가 죽을 때마다 우리는 함께 안다. 이 모든 것은 단발적인 사고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희생자만 바꿔 반복되고 있는, 보호받지 못하는 역사의 산증인이라는 것을, 사회가 우리를 보호해주지 않고 언제든지 그것이 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한 발짝 떨어져 조소하고 외면하고 싶은 이들에게 묻는다. 정말 2022년 10월 29일이 기억나지 않느냐고. 뉴스 속보를 보고 가슴이 철렁했던 기억, 뉴스를 새로고침하며 아침이 두려워 잠못드는 그 감각, 알고 있지 않느냐고. 우리는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 없는 살아있는 증거다.
나는 안산에서 대학교를 다니며 학교 앞에서 자취를 한다. 알바를 하려고 걸어가다 보면 단원고등학교를 지나치고, 학교 앞을 여전히 물들이고 있는 노란 리본을 보고, 기억하자는 말. 기억하자는 건물. 기억하자는 행사... 한 다리를 건너면 누군가는 어떤 소식에 소스라치게 놀라고, 또 한 다리를 건너면 누군가는 눈물짓는 그런 도시가 있다. 어젯밤에 뉴스가 뜨고 근처에 사는 동기들과 택시비를 모아 곧장 국회 앞으로 갔다. 뭔가를 지켜야겠다는 사명감? 잘못된 걸 바로잡아야겠다는 정의감? 난 잘 모르겠다. 나한테 그런 건 없는 것 같다. 나한테 그런 용기는 없는 것 같다. 친구가 내일이 오면 탄핵 시위를 간다길래 나는 말렸다. 지금 계엄령이 떨어졌는데 시위는 무슨 시위야. 위험하니까 가지 마. 그런데 사람 마음이 그렇다. 얼마 안 가서 그냥 지금 바로 가자. 그렇게 됐다. 동기들과 팔짱을 꼭 끼고, 우리 혹시 총소리 들리면 바로 튀는 거야, 했는데 "그런데 얘들아, 솔직히 난 싸울 것 같아. 미안해..." 다들 그랬다. 나한테 있었던 건, 그냥 그 시간에 곧장 함께 나와준 동기들에게 고마운 마음. 그뿐이었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안전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안온하고 평범한 일상이 이토록 유약하구나. 그렇게도 돌아가고 싶은 하루하루였구나.
거짓말처럼 아침이 왔다. 거짓말처럼 새벽이 지나 다행스럽게도 일상을 되찾은 것처럼 아침 수업을 갔다. 어젯밤 일찍 잠든 사람은 아침 뉴스를 보고 이게 무슨 일이래, 혹은 결국 별 일 아니었네, 하고 넘길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내가 삶으로 새겨온, 내 세상이 무너지고 있다는 감각이 주는 충동으로 글을 쓴다. 내가 고작 할 수 있는 것이 글을 쓰는 것뿐이라는 무기력으로 쓴다. 부디, 어젯밤을 잊지 마시길. 언론과 출판이 통제되고, 영장 없이 체포와 처벌이 가능해졌던 그 몇 시간의 공포가 어찌나 말도 안 되는 것인지, 그 개연성 없는 현실의 공포를 잊지 마시길. 우리 사회가 지금 팔짱을 낀 나의 친구를, 내 또래를, 우리의 생명을 다루는 방식과 태도가 변하지 않으면 희생자는 어디로 향할지 모르는 명단이 되어 처참히 반복된다. 우리 세대의 절망과 삶의 가치를 살피지 않으면서 허상 속 시대정신과 태도를 힐난하며 보호 밖으로 우리를 밀어낸다. 아침의 소식이 두려워 잠들 수 없는 익숙한 감각, 삶의 언저리에서 묻어나오는 시대의 트라우마를 알면서도 더이상 외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들아, 낙담하지 말 것. 이 세계가 무너지고 있다는 공포, 이 세계를 사랑할 수 없는 무기력은 우리를 엄몰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세계를 바꾸는 움직임이 촉발되는 것은 엄청난 정의가 아니라 내 옆에 있는 '내'가 잡은 손이기 때문이다. 가까운 세계가 요동하고 있을 때 우리는 움직인다. 함께 팔짱을 낀 친구들과 나아갈 때 싸울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그리나 우리는 내 세계를 실감해야 한다. 그러니 타인을 가까이 여겨야 한다. 움직임을 일으키는 하나의 요동이 불어나도록, 진동의 우리를 타고 넘쳐나도록. 개연성을 상실한 현실이 거짓말처럼 희망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는 것을 기억하도록.
그러니 나는 죽지 않을 테다. 살아서 목격자가 될 것이다. 보호받지 못한다는 공포를 삶에 새긴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남아왔는지 전부 글로 남길 테다. 우리는 21세기, 트라우마의 산증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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