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돈면이야기>

9_새로운 환경

불주먹 류니쓰 2024. 12. 5. 02:27

새로운 환경
 

사람들과의 연대가 나를 다시 일어나게 했다면, 새로운 직장은 나를 한 발짝 더 내디딜 수 있게 했다.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서 하나씩 배우며 적응해 가는 과정은 내게 또 다른 도전이자 기회였다.

바쁜 나날들을 보냈다. 피부미용사 자격증 시험에 합격한 뒤, 취득한 자격증으로 새로운 직장에 들어갔다. 집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작은 피부과 병원이었다.
 
면접에서는 성격 좋아 보이는 원장님을 만났고, 친절한 직원이 내게 맞는 유니폼을 보여주며 병원 내부를 안내해 줬다. 분위기가 좋아 보였다. 직원은 열 명 정도로, 모두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
 
딱히 따지는 성격이 아니라서 “이 정도면 괜찮겠다” 싶어 다음 주부터 출근하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한국에 돌아온 뒤 처음으로 직장을 가지게 되었다.
 
몇 년 만에 돌아온 한국 생활은 정신없이 바빴다. 여태까지는 샵에서만 근무해 봤고, 병원 경력은 전무했기에 모든 것이 새로웠다.
화장품부터 약품, 병원 물품, 기계 사용법, 부자재까지 익혀야 할 게 너무 많았다.
 
주사기의 종류가 이렇게나 다양한 줄도, 바늘의 종류가 이렇게 많은 줄도 몰랐다. 바늘을 버리는 전용 통이 따로 있다는 사실도, 피 묻은 폐기물을 별도로 처리해야 한다는 점도 처음 알았다.

폐기물 처리 날짜가 정해져 있다는 것도 배웠고, 믹스한 약품은 냉장 보관해야 하고 사용 기한이 지나면 폐기해야 했다. 앰플은 사용 전후로 알코올로 닦아야 했고, 항상 채워둬야 하는 알코올 솜은 채워놓기만 하면 사라졌다.
 
그렇게 매일매일 새로운 사실들을 배우며 적응해야 했다. 내가 생각하던 위생과 병원의 위생 개념은 완전히 달랐다. 멸균의 중요성도 새롭게 배웠다. 유치원생이 된 기분이었다. 사수에게 매일 혼나고, 물어보는 것에 대답도 제대로 못해서 스스로가 원숭이가 된 기분이었다.
 
 
다리털 제모 레이저와 겨드랑이 제모 레이저가 서로 다른 기계를 사용하는 줄도 몰랐다. 그냥 쏘면 되겠지라고 생각했었다. 환자마다 다 다른 출력값을 사용해야 했고, 어쩌다 오류가 나면 기계가 멈췄다. 작동을 멈춘 기계를 볼 때마다 남들 몰래 발로 차버리고 싶었지만, 몇억짜리 기계를 보며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스트레스는 극에 달했지만,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출퇴근 시간 내내 암기할 것들로 머리가 가득 찼다. 출근해서는 적응하느라 손발이 바쁘게 움직였다. 하루하루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정신없었다.
 
병원에 취업하고 처음 몇 달은 정말 힘들었다. 버스를 타고 출근하다가 교통사고가 나서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고단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취업한 곳이 레이저 전문 병원이었다. 그래서 기계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이 다른 피부과보다 더 많았다. 전혀 몰랐다.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는 마음으로 버텼다. 그렇게 버티다 보니 어느 순간 적응하게 되었다. 적응기가 지나고 나니 병원 일이 익숙해졌다. 인간은 적응하는 동물이 맞다. 나는 진화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를 지나 호모사피엔스로.
 
 
일이 익숙해지면서 선생님들과도 친해졌다. 자연스레 회식이 잦아졌다. 회식에, 회식에, 또 회식까지. 그리고 그 자리에서 빠지지 않는 술. 역시 한국에서 마시는 술이 제일 맛있었다.

병원 선생님들과의 관계는 많이 발전했다. 처음에는 사수의 엄격함 때문에 힘들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도 팀의 일원으로 인정받았고, 동료애가 생겼다. 바쁜 날들을 함께 버텨내고, 회식 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를 이해해갔다. 그렇게 일터에서의 관계는 점점 단단해졌다.

정신없이 바쁘게 지내다 보니, 김영수에 대한 기억은 자연스레 뒷전이 되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배우고, 일에 몰두하는 과정이 힘들기도 했지만, 다시 살아갈 힘을 주었다. 그렇게 나는 조금씩 내 삶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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