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도 아니고 저럴 수가…” 주인 잃은 192켤레의 신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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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도 아니고 저럴 수가 있나요?”
25일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을 지나가던 시민 김성천씨(55)가 검은색 현수막을 바라보고 이렇게 말했다. 현수막에 적혀있는 숫자는 1672. 지난 2009년부터 15년 동안 친밀한 관계의 남성 파트너에 의해 살해당한 여성과 그 주변인을 합한 숫자다.
김씨는 “숫자가 너무 커 잠깐 충격을 받았다. 전혀 모르고 있었다”며 “정부는 10명 중 1명이라도, 100명 중 1명이라도 살리기 위해 지원을 쏟아야 하는 것 아니냐”라고 말했다. 현수막 앞에는 누구의 것인지 모르는 192켤레의 신발이 놓여있었다.
세계 여성폭력 추방 주간을 맞아 한국여성의전화는 이날 오전 11시30분부터 오후 7시까지 보신각 앞에 신발 192켤레를 전시했다. 이 신발들은 지난해 친밀한 관계에 있던 남성에 의해 살해당한 피해자 192명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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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전화는 “수백의 여성이 친밀한 관계의 남성 파트너에 의해 죽어가는데, 정부는 마땅한 근절 조치조차 하지 않고 있다”며 “세상을 떠난 여성을 기억하고 죽음을 멈추길 바라는 마음에서 전시를 준비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지난해 교제살인 피해자 192명 중 17명은 사망 전에 교제폭력을 신고했는데도 보호받지 못한 채 살해됐다”며 “수사·사법기관은 관련 법이 미비하다는 핑계만 대지 말고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일을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날 발걸음을 멈추고 전시를 본 시민들은 “이렇게 많은 사람이 친밀한 관계의 사람에게 죽임을 당했을 줄 몰랐다”고 입을 모았다. 김경준씨(61)는 ‘아빠에게 살해당한 재민·유나·도윤의 신발’을 보다가 오른손으로 눈가를 훔쳤다. 김씨는 “이렇게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뉴스엔 왜 이런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인지 모르겠다”며 “우리 시대에서 전혀 안 바뀐 것 아니냐”고 말했다. 이미영씨(45)도 “이렇게 많은 사람이 데이트 폭력으로 죽었을 줄은 몰랐다”며 “조카도 있는데 많이 불안하다”고 말했다.
시민들은 정부의 대책이 부족하다는 지적에 동감했다. 대학생 딸과 함께 서울 나들이를 온 양모씨(45)는 “차라리 딸이 결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면서도 “정부에서 아이를 낳으라 하기 전에 안전 문제를 먼저 고민해야 한다”고 했다.
“옴마나, 애기도 죽었대”라며 신발 위 적힌 글자를 한참 바라본 김모씨(62)는 “정부에서는 제대로 통계도 안 만든다고 하는데, 이런 문제를 정부가 파헤쳐야지 도대체 누가 하느냐”며 “다 내 일 같아 안쓰럽고, 신경질이 나서 죽겠다”고 말했다.
고질적인 여성 혐오를 해소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엄마의 지인에게 살해당한 유민이의 신발’을 한참 바라보던 정모씨(60)는 “딥페이크 문제가 터지자 ‘가해자 숫자가 잘못됐다’며 갈라치던 정치인들에게 이게 현실이라고 보여주는 전시”라고 말했다. 그는 “20~30대뿐 아니라 70대도 40대도 돌아가신 분들이 있다. 나이의 문제가 아니라 성별의 문제라는 것”이라며 “이 사회에 쌓인 여성 폭력을 묵인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 오동욱 기자 5dong@khan.kr